아버지의 눈물 [하나님의교회,안상홍하나님]
하늘의 잃어버린 자를 찾아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의 진리를 가지고 오신 안상홍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교회(안증회)는 유월절을 가지고 오셔서 모든 인류가 살 수 있는 법을 알려주신 안상홍님을 믿고 그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구원을 베푸셨듯이, 안상홍님께서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하나님의 교회(안증회)를 세워주시고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안증회) 성도들이 안상홍님을 믿는 이유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 안상홍님 어머니하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안증회),총회장김주철목사-
<수필한편>아버지의 눈물
어머니를 일찍 여읜 저는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 깊은 산속 작은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겨울이면 눈과 매서운 바람에 맞서 사투를 벌여야 했지요. 집도 웃풍이 심해 아침에 잠에서 깨면 찬 기운이 코끝을 스치곤 했습니다. 그러나 새벽이면 어김없이 제 방 아궁이에 불을 때시는 아버지 덕분에 바닥만큼은 뜨끈뜨끈했습니다.
제가 학교에 가려고 방문을 열면 아버지는 제 운동화를 꼭 쥐고 계시다가 발밑에 가지런히 놓아주곤 하셨습니다. 종종 땔감을 구하러 가시는 길에 저를 데리고 가기도 하셨지요. 쌓인 눈을 헤치고 모닥불을 피워주시곤 홀로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시면 저는 산속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도끼질 소리를 들으며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불을 쬐며 기다렸습니다.
오랫동안 광산에서 일하셨던 아버지가 ‘진폐’라는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아버지는 혼자 있는 제가 걱정되어 몰래 집을 다녀가기도 하셨습니다. 병원에서 나온 고기와 생선 등을 펼쳐 놓으시고는, “어서 먹어! 맛있지?” 하시면 저는 “응, 맛있어! 또 가져와야 해.” 하며 잘도 먹었습니다. 산골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반찬이 그리 맛있을 수 없었습니다. 맛난 것은 모두 제게 갖다 주시느라 아버지는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셨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 못한 채 말입니다.
중학교 입학과 함께 저는 읍내에 나와 자취를 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겨울밤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하는데 담임선생님께서 “정숙아! 너희 할아버지 오셨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교실 밖으로 나가 보니 아버지가 초라한 모습으로 서 계셨습니다.
제가 늦둥이어서 아버지는 누가 봐도 제 할아버지뻘로 보였습니다. 깡마른 몸에 쭈글쭈글한 얼굴. 저는 그런 아버지가 창피해서 얼른 구석진 자리로 가, 왜 오셨냐고 뾰로통하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웃으며 등에 짊어진 나무상자에서 연탄 여섯 장을 꺼내셨습니다.
“너 연탄 떨어졌을까봐 가져왔다.”
“아버지는… 연탄 있어요!”
연탄 때문에 눈보라를 헤치며 십 리도 넘는 길을 걸어오신 아버지께 화가 났습니다. 쏘아붙이는 저의 대답에 아버지는 가까운 구멍가게로 들어가 한참 뒤 빵을 갖고 나오셨습니다.
“연탄을 빵으로 바꿨다. 시장하지? 어서 먹어라.”
아버지는 이 말을 남긴 채 다시 어두운 눈길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서울에 상경하여 도시물을 먹다보니 어느새 아버지는 뒷전이 돼버렸습니다. 다 커서 성인이 되어도 오로지 제 걱정뿐인 아버지는 종종 쌀자루에, 산나물 보따리에,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오셨습니다.
“건강이 최고야, 정숙아 건강해라. 아버지 소원이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난 후, 언제부턴가 아버지께서 오지 않고 계시다는 걸 알았습니다. 저는 그제야 아버지께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문에 들어서며 아버지를 불렀지만 아무 대꾸도 없으셨습니다. 방문을 연 순간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방바닥 여기저기에는 양동이며 세숫대야 등이 널브러져 있었고 천장에서는 빗방울이 새고 있었으며 그런 방 한구석에 아버지가 입을 벌린 채 가쁜 숨을 내쉬고 계셨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너무나 큰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요.
상경하여 집수리 업체에 전화를 걸어 수리를 부탁한 지 며칠 후 아버지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가쁘게 들렸습니다.
“정숙아,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이 제일 멋지다. 고마워.”
집이라곤 세 채밖에 없는 산골에 우리 집이 최고라며 울먹이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니 목이 메어왔습니다.
아버지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었습니다. 다시 시골집을 찾았을 때 아버지와 함께 뒷동산에 올랐습니다. 풀밭 위에 걸터앉아 발아래를 내려다보던 아버지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셨습니다. 지난번 죄송한 마음에 생애 처음으로 선물해드린 실반지였습니다. 아버지는 한참 만에 입을 떼셨습니다.
“정숙아, 여기 있는 것이 개두릅나무고, 저기 있는 것이 참두릅나무야.”
“네, 아버지.”
그러곤 또 한동안 침묵하시다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정숙아, 여기 있는 것이 개두릅나무고, 저기 있는 것이 참두릅나무야.”
“네, 아버지….”
이상했습니다. 아버지는 했던 말씀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계셨습니다. 후에 동네 어르신께 들은 말로는 아버지가 얼마 전부터 넋이 나간 모양이라고, 돌아가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돌아갈 채비를 하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면서 아버지께 휴가를 내고 다시 오겠다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그래, 내 걱정은 말거라. 어서 가.” 하며 저를 배웅해주셨습니다.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는 웃고 계셨습니다. 버스가 동네 입구로 들어오는 게 보여 다시 뒤를 돌아보았더니 아버지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눈물이었습니다. 작별인사도 없이 세상을 훌쩍 떠나버린 아버지를 떠올리면 야속하기 그지없지만 아버지의 눈물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제 삶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힘이 들 때마다,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그 눈물의 의미를 곱씹으며 다시 일어설 이유를 찾습니다. 제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을 진한 여운을 남기고 가신 아버지, 당신이 그립습니다.
-By Elohist